나는 순자형이 말했던, 사람은 천성적으로 악하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홉스형도 말했지만 인간이 생존권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지구가 무한맵이 아닌 이상, 내가 아닌 타인은 나의 생존을 위해 언제든 죽어 줘야 하는 후순위 존재일 뿐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은 자연권이란 본능 앞에 순리라고 하면 순리란 말이다. 따지고 보면 생명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사람이 근본적으로 악하니 선하니를 따지고 앉아 있는 것은 사회란 조직의 존속을 위해 위정자들이 교육하고 있는 프레임에 불과하다. 선과 악에 앞서 생존과 소멸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프레임 안에서 우리는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개인을 악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회를 경험하고 관찰하다 보면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살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가끔 자식이나 부모를 위해 희생하기도 하고, 대의란 것을 위해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스스로 져버리고 사그라 들기도 한다. 가끔은 폭탄을 안고 뛰어들어 누군가를 위해 망설임없이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들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듯 인간은 악하다는 명제의 반례로 들이밀 수 있는 것일까. 노노
앞에서 말한 예시들에 정확한 boundary를 설정하고 좀 더 명확화해 보면 사람들은 딱 자신의 중심으로 의미있는 범위 안의 사람만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사람별로 그 범위가 다를 뿐이다. 자식이나 부모를 위해 대신 죽는 사람은 그 의미있는 범위가 가족일 뿐이고, 인샬라를 외치며 몸을 던지는 사람들의 의미있는 범위는 종교일 뿐이다. 만약 사람이 천성적으로 선하다고 하다면 반대로 그 범위란 것은 자신에게 의미없는 것들을 의미하게 되고 그것에는 주로 적대적인 대상이 속해야 한다. 인간이 천성적으로 선하다면 그 범위는 0이거나 최소한 전체의 서브셋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과연 그러한가. 의미없는 것들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들을 제외하고는 그보다는 반드시 클 여집합 모두를 위해 살아가고 또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고 말할 수 있느냔 말이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직관적이다. 단연코 내 인지의 범위 내에서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 범위의 반지름을 0에서 부터 시작해 가장 먼저 엄마,아빠을 그리고 점점 형, 누나, 동생, 친구, 선생님과 같은 타인을 자신의 의미있는 범위에 편입시켜가며 반지름을 늘려간다. 이후 교육에 의해 국가와 중교와 세계에 대한 인식들이 편입되어 가고 그 범위 안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게 되어 가는 것이다.
당연히 선의 부재가 악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존을 위해 개인이 발버둥 칠 때 그 개인의 의미있는 범위 밖에 있는 사람은 그 살고자 발버둥치는 사람을 악이라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생존은 곧 내가 누릴 기회와 자원이 줄어듬을 의미하니까.
우리가 사람과 만나고, 연을 만들고, 이어 나가는 것은 그 의미있는 범위에 서로가 속하게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길거리에서 사시미를 휘두르는 조폭이라도 자신의 의미있는 범위의 사람들에게는 가슴 따뜻할 것이고, 그 옛날 신하와 백성들을 발 밑의 개미처럼 쉽게쉽게 죽이라 명했던 폭군들도 자신의 의미있는 범위의 사람들에게는 애틋했을 것이듯, 일반적인 사람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의미있는 범위에 들어가고자 노력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영속적인 안전을 보장받고자 노력한다.
....처절한 고독이 과연 진정한 자유를 의미하는 걸까.
Posted by ekARma